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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조적인 궁예와 왕건의 신화
    카테고리 없음 2021. 12. 22. 00:17

    우리나라 역사에서 신화의 시대는

    ’고대(古代)‘입니다.

    고조선과 고구려, 신라 같은

    고대국가가 형성되던 시절에

    여러 신화가 생겨났지요.

    아직 법과 제도, 종교와 문화 등이 정착되기 이전에

    세계질서의 중심 구실을 한 것이

    바로 신화였습니다.

    고구려와 백제, 신라 등

    삼국이 자리를 잡은 뒤

    불교가 정착되고 법질서가 갖춰지는 과정을 거치면서

    건국신화의 역할은 축소됩니다.

    연구자들은 중세가 시작되면서

    ’신화의 시대가 저물었다‘고 말하곤 합니다.

    하지만 삶을 지켜줄 신성한 힘에 대한 기대는

    늘 존재해 왔습니다.

    그리고 종종 건국신화의 재림이라 할 만한

    현상이 생겨났지요.

    큰 전쟁 등으로 세상이 흔들리면서

    생존이 절박해질 때

    사람들은 새로운 구원자를 찾았고,

    그를 주인공으로 한 신화적 이야기들이

    만들어졌습니다.

    천년왕국 신라가 힘을 잃어가면서

    세상이 혼란에 빠졌던 후삼국 시대는

    바로 그런 때였습니다.

    후백제의 견훤과 태봉의 궁예,

    고려의 왕건 등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신화적 서사들이 퍼졌지요.

    그 중에도 궁예와 왕건의 경우가

    대조적이어서 주목할 만합니다.

     

    사진출처 태조왕건

     

    후고구려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태봉(泰封)으로 바꾼 궁예 왕에 대해서는

    문헌과 구전으로 여러 이야기가 전해 옵니다.

    궁예는 신라 왕의 아들로 알려져 있지요.

    그 아버지는 헌안왕(憲安王)이라고도 하고

    경문왕(景文王)이라고도 합니다.

    <삼국사기 열전>에 따르면, 궁예가

    외가에서 태어날 때 지붕 위로

    무지개 같은 하얀 빛이 뻗쳐 하늘에 닿았다고 합니다.

    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빨이 있었지요.

    한 신하가 나라에 이롭지 않은 일이라고 하자

    왕은 사람을 시켜 아이를 죽이게 합니다.

    다락 아래로 던져진 어린 궁예를

    유모가 몰래 받았지요.

    그때 손가락에 눈이 찔려

    한쪽 눈이 멀었다고 합니다.

    왕실에서 버려진 채 유모 손에서 자란 궁예는

    뒷날 승려가 되어서 이름을

    ’선종(善宗)‘이라고 했습니다.

    양길이 이끄는 농민반란군에 들어간 뒤

    점차 세력을 확장해 갔지요.

    결국 양길을 물리치고

    후고구려를 세워서 왕이 됩니다.

    여기서 하나의 반전이 있습니다.

    궁예는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오르고자 합니다.

    세상을 구원할 ’미륵불‘임을 자처하면서

    신력(神力)으로써 백성을 지배하고자 하지요.

    TV 드라마 속에서 궁예가 이른바

    관심법(觀心法)을 구사하며

    ’옴마니 반메훔‘ 주문을 외우게 하던 장면을

    아실 것입니다.

    그 결과는 파멸이었습니다.

    궁예는 독단적 정치로 민심을 잃었다고 하는데,

    무리하게 신화의 주인공이 되려 한 것이

    문제였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특히 자기 자신을 신격화한 것은 무리수였지요.

    이미 중세로 접어든 세상에서

    사람들이 원한 것은 합리적 국가 체계와

    운용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궁예가

    스스로 신의 자리에 오르고자 한 것은

    말 그대로 ’오버‘였지요.

    고대 신화의 주인공인 단군이나

    주몽도 자신을 ’신‘이 아닌

    ’신의 아들‘의 위치에 두었음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러합니다.

     

    그렇다면 궁예에 이어서 왕이 되고

    후삼국을 통일해서

    새 왕조를 이룬 왕건의 경우는

    어떠했을까요?

    많이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그에게도 신화적 스토리가 있습니다.

    <고려세계(高麗世系)>라는 책에

    고려 건국신화로 볼 만한 이야기들이 실려 있지요.

    흥미로운 것은 신화적 내용이

    왕건 자신이 아닌 조상들의 사연으로

    돼있다는 사실입니다.

    그 주인공은 호경과 작제건 등입니다.

    왕건의 윗대 조상인 호경은

    호랑이 덕에 목숨을 건진 뒤

    여산신의 짝이 되어 산의 왕이 되었다고 합니다.

    호경의 손자인 보육의 딸은 오줌으로

    온 세상을 덮는 꿈을 꾼 뒤에

    중국 황제와 인연을 이루어

    작제건을 낳았다고 하지요.

    작제건은 용왕을 괴롭히는 여우를

    활로 쏴서 물리친 뒤

    용왕 딸과 결혼합니다.

    작제건과 용녀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용건이고,

    용건의 아들이 바로 왕건이지요.

     

    이야기는 왕건의 할아버지인

    작제건까지를 신화적 인물로 그려냅니다.

    왕건 자신은 그러한 신이한 사연이 따로 없지요.

    비범한 인간으로서

    인품과 능력, 영웅적 업적 등을 전할 따름입니다.

    왕건이 민심을 얻어서 후삼국을 통일하고

    5백년간 이어질 새 왕조를 창업한 것은

    우연이라 할 일이 아닙니다.

    그는 시대에 어울리는 방식으로

    자신의 신화를 만들어갔습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신화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형성된 ’인간의 신화‘였지요.

     

    오늘날의 신화를 생각해 봅니다.

    살펴보면 세상 곳곳에 많은 신화들이

    명멸하고 있습니다.

    정치권력이 있는 곳에

    갖가지 신화적 스토리가 만들어지고,

    경제적 성공에도 ’신화‘라는 말이 붙여집니다.

    ’스타‘들이 뜨고 지는 연예계 같은 곳도 예외가 아니지요.

    그렇다면 그 신화들은 진짜일까요, 가짜일까요?

    진짜일 수도 있고 가짜일 수도 있습니다.

    큰 감동과 함께 우리 삶을 일깨우고

    힘이 돼주는 사연들은 진짜라고 할 만하지요.

    문제는 그렇지 못한 가짜가 더 많다는 사실입니다.

    신화로 일컬어지는 사연에서

    가짜와 진짜를 가르는 기준은 무엇일까요?

    당사자나 추종자가 과장과 미화를 섞어서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신화는

    가짜라 할 수 있습니다.

    스스로를 신격화하는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지요.

    그것은 존경과 화합 대신 독단과 억압,

    그리고 갈등을 가져오게 됩니다.

    이와 달리, 사람들 사이에서

    저절로 우러난 것이면서

    삶의 실체적 진실을 오롯이 담아낸 신화는

    진짜라고 할 만합니다.

    그런 신화와 만나는 것은

    행복하고 소중한 일이지요.

    여러분의 삶이 그와 같은

    ’진짜 신화‘로 펼쳐지면 좋겠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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